마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세상의 체계는 사람을 이렇게 끈질기고 완고하게 만든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고 싶었다. 그래서 덫을 놓고 유인한다. 세금문제는 예민한 문제다. 흑백논리에 걸리는 문제다. 세금을 내라하면 율법에 걸리고 내지 말라하면 실정법에 걸린다. 예수님은 그 흑백논리의 프레임 자체를 넘어서신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하신 말씀(21절)은 절묘하다. 이 구도는 바울이 쓴 로마서에까지 이어진다(롬 13장).
바리새인들의 자기 확신은 또 하나의
게토를 만들었다. 예수님도 거부할 정도의 영역이 되었다. 오류와 왜곡이 율법의 포장을 하고는 경건한 것 같은 형태로 착각에 빠지게 하는 교묘한 어두움이다. 생각의 길이 다르다는 게 이렇게 치명적일 수 있다.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하다니.. 그런데 사람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심각하게 다루어야 한다. 단지 생각인 거 같지만 거기서 천국과 지옥이 갈린다.
결국 성령 아니고는 사람에겐 답이 없음을 절감한다. 각성케하시며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감화가 없다면 어떤 포지션에 있어도 오류와 왜곡의 체계를 벗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감화가 임하면 달라진다. 극우파 바리새였던 바울이 변하듯 달라진다. 박해를 하려고 달리던 길에서 변화된 것을 보면 꼭 예배당이나 집회의 자리에서만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죄를 짓는 현장에서도 각성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자기 생각’의 길에서 성령의 빛이 인도하는 ‘주님 생각’의 길로 옮겨 타야 한다. 성령의 빛을 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한다. 나와 모두를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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