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9:8-9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당시 세리장이요 부자라함은 토색질의 대가였다는 말이다. 사회 구조상 그리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계산적이고 냉정하며 눈치도 빨라 강자에겐 한없이 약하고 약자에겐 무서운 속물근성을 지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놀라운 전환이 일어난다. 예수께서 이름을 부르시고 함께 하자 하시며 일어난 일이다.
그 전환은 주님을 보려고 나무에 오르면서부터 시작된다. 아니 ‘쩐’을 밝히던 그가 ‘주’를 보려고 주가 계신 곳으로 걸음을 딛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앞선 부자관리는 자기 의로 가득했지만 삭개오에겐 갈급함이 가득했다. 갈급한 영혼은 주님의 눈에 쉽게 뜨이는 거 같다. 삭개오의 내면은 누군가 길만 트면 와락 쏟아질 것 같은 아구에 근접해 있었다.
베드로가 만선 후에 바로 무릎꿇고 죄인임을 고백했던 것처럼, 삭개오 역시 회개를 망서리지 않는다. 그는 소유의 절반을 내놓는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했다는 징표다. 단박에 그는 누구를 붙들어야 하며 무엇이 중한가를 깨달았다. 만인이 손가락질했던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선언하신다. 갈급함과 회개하는 마음은 주님을 만나는 지름길이다. 그 마음이 실질적 변화와 맞물릴 때 생은 새로워진다. 할 수 있는 한 조금씩이라도 그런 변화의 길을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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