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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8:6-7


욥 8:6-7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빌닷의 말은 그 자체로 구구절절 그른 데가 없다. 그러나 그 말이 권선징악 개념에서 오는 판단에 바탕한다는 점이 문제다. 원칙적으로 판단은 사람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관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 하신 이유다. 판단을 안하면 어떻게 인생을 사는가. 분별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요 8:50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예수님의 기조는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시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모든 판단을 다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판단은 아슬아슬하다. 대부분 정죄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분별은 하나님의 뜻에 경사되지만 판단은 내 기준에 집중한다. ‘다름’도 ‘틀림’으로 보거나, 자기 잣대로 단정한다. 빌닷은 구구절절 옳은 데도 얼마든지 헛짚을 수 있는 게 사람임을 보여준다.


사람은 애초 하나님과의 영적 소통을 통해 순종의 길을 가면 되었다. 그 소통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주님의 음성듣기가 최고조로 활성화되고 하나님 수준의 지혜와 식견들이 발휘되며 창대했을 것이다. 신자는 최소한 천성에서 창대해진다. 그건 떼어놓은 당상이다. 이 땅에서 창대해지는 길은 예수님처럼 사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 그게 진정한 창대함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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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가만히 들어온 사람은 이단을 말한다. 이단은 처음엔 비슷했다가 끄트머리에서 표변한다. 그들의 논지는 비슷하다. 결국 예수 그

삼상 31:4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사울은 전장터에서 자살로 생애를 마감한다. 블레셋에게 죽임당했다는 모욕을 피하기 위해서다. 사울의 재

삼상 30:24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아말렉을 쳐부순 뒤, 전리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차별대우가 거론된다. 본문은 이 때 다윗이 내린 지침을 알려준다. 즉 전방에 있던 사람과 후방에 있던 사람 사이에 차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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