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36:10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엘리후는 고난이 지닌 결정적인 기능이 사람을 죄악에서 돌이키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사람은 고난을 겪을 때 자신을 돌아본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남 탓이나 환경 탓을 하며 외부에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오래 전, 주행하는 차량 뒷 유리에 ‘내 탓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스티커를 본 적이 있다. 고난과 상관없이 그렇게 내적 성찰을 잘 할 수 있다면 고난을 면하거나 아니면 고난을 덜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C.S.루이스가 했던 그 유명한 말, ‘고난은 하나님의 메가폰이다.’는 말은 진실이다. 본문은 그 말의 엘리후 식 버전인 셈이다. 만일 고난이 없었다면 사람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량처럼 의의 길에서 더 어긋났을 것이며 상상을 넘는 파국을 맞이했을 것이다. 어찌 됐든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눈으로 뵙는 계시적 은총을 체험한다. 그의 하나님 의식은 고난 이전과 이후로 갈라진다. 고난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했다. 고난이 꼭 죄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는 고난이 있는가 하면, 무지에서 벗어나게 하는 고난이 있다. 엘리후는 전자를 말했고, 욥은 후자의 케이스다. 전자는 징계이고 후자는 학습이다. 반면 죄에 빠진 다른 이들을 돌이키게 하는 고난도 있다. 사명적 고난이다. 십자가의 고난, 바울이 선교하며 겪은 고난이 그렇다. 엘리후는 절반도 못 맞춘 셈이다. 분명한 건 고난에 뜻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차원의 고난이든 그걸 건져야 한다. 나는 건졌을까. 아니면 건지고 있을까… 그것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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