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3:29-30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이고 신랑의 들러리는 세례요한이다. 요한은 들러리 마인드를 가졌다. 자신의 제자들이 커져가는 예수님의 영향력을 의식하면서 자신들의 입지에 대해 걱정할 때도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헷갈리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조차도 예수님을 따르도록 권한다. 하나 둘 씩 그와 함께 하던 제자들이 그의 곁을 떠날 때 자신의 소명의 정점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사실 모든 피조물이 구비해야 할 마음가짐 아닌가. 신앙과 사역의 길을 걸어오면서 내가 하는 일이 흥하는 데 관심이 많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흥하고 그는 나를 도와야 하리라.. 그러니 주님과의 씨름을 피할 수 없었다.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한 씨름이다. 심지어 이 씨름은 일이 잘 되는 중에도 벌어졌다. 씨름하면서도 일은 봐주시는 형국이다. 주님의 은혜는 끝이 없다.
느즈막이 되니 씨름의 승부가 눈에 보인다. 모래판에 엎어진 건 당연히 나다. 그러나 패대기치신 게 아니고 단지 무릎을 꿇게 하셨을 뿐이다. 나는 여전히 예배와 사역의 자리에 설 때마다 내 속을 들여다 본다. 어느 쪽이 주인공이고 어느 쪽이 들러리인가를 분별하기 위해서다. 본문을 통해 요한은 내게 철저한 들러리 마인드를 권한다. 돌이켜보니 철저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나의 여생과 사역을 통해 예수께서 흥하게 되기를 소원한다. 나이가 60이 넘었는데도 여전한 영성의 유치함에 부끄럽다. 나는 언제 세례요한처럼 영성의 철이 들을까.
*세례요한처럼 들러리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들러리 마인드가 깊이 뿌리내리게 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