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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의 길 86ㅣ마 24:38-39
새 사람의 길-86 마24:38-39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경건했던 셋 계열(창 4:26)은 노아 가족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홍수 즈음에 구원이 임한 가정은 노아 집안 뿐이었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셋의 경건한 후손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 다수가 부패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홍수 심판을 피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먹고 마시는 문제와 시집가고 장가가는 문제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계속 후순위로 밀려나면서 구원으로부터도 멀어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는 셋의 후손이요 하나님을 모르지 않으니 괜찮을거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많다. 홍수가 시작되며 가장 먼저 닫혀진 방주의 문을 두드렸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순위의 문제는 사실상 습관에서 결정된다.
새 사람의 길 85ㅣ마 24:38-39
새 사람의 길-85 마24:38-39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분명 강도나 거짓과 같은 죄는 아니다. 그러나 그 일들이 구원의 방주를 타지 못하게 한다면 오십보 백보라는 뜻이다. 현실적으로 이런 경우는 부지기수다. 우선 영원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당장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교회를 멀리 하는 경우, 항상 어떤 이유가 있어 주님 아닌 쪽을 먼저 택하는 경우다.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은 좀 더 명분이 분명하게 보인다. 특별한 일이기에 그렇다. 예수님이 그런 특별함을 경시하시는 건 아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좀 더 근본을 짚으신다. 이미 주님과의 관계가 당사자들의 우선순위에서 후순위로 밀려나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현실이 영원을 밀어내는 구조적 상태를 이르심이다.
새 사람의 길 84ㅣ민 23:19
새 사람의 길-84 민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본문은 조지 뮐러가 바라보았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한다. 즉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뮐러의 전기 작가인 아서 피어슨은 밀러의 신뢰가 ‘기적 체험‘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라는 확신에서 온 것임을 강조한다. 뮐러의 믿음은 ‘기도-응답’의 메커니즘보다 ’말씀-믿음-행동’의 구도였던 것이다. 뮐러가 열정적인 기도보다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마음에서 오는 기도를 권한 이유다. 그 마음은 성령의 조명을 받은 말씀에서 조성된다. 그래서 성경은 통독도 필요하지만 정독이 우선한다. 실제로 뮐러는 이런 고백을 했다. “나의 감정은 곧잘 오락가락했다. 하지만 약속은 변하지 않았다.” 말씀과 기도의 순서가 최선이다. 이 구도가 기적을 부른다.
새 사람의 길 83ㅣ시 100:4
새 사람의 길-83 [시100: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첫 관문이 감사다. 갈망이나 절박함도 임재의 문을 두드리는 주요한 동기가 되지만 성경적인 감사는 하나님의 관점을 가질 때 우러나오는 마음인 까닭에 보다 수월하게 하나님의 궁정에 들게 한다. 하나님으로 인한 감사도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님이 뭔가를 주셔서 감사하는 것과 단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으로 인해 드리는 감사다. 월터 브루그만은 감사를 ‘대안 세계(alternative world)’로 들어가는 입장권으로 표현한다. 세상이 쓰는 결핍과 불안의 언어에서 선하심과 부요의 언어를 통해 하나님의 세계로 인식이 이동하는 전환을 말한다. 이러기에 감사는 의지적인 출발이 필요하다. 신자의 마음이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궁정에 뛰어들자. 적용 : 하나님 향
새 사람의 길 82ㅣ골 2:6-7
새 사람의 길-82 골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리스도는 텃밭이다. 신자는 그 터에 뿌리를 내림으로 하나가 되어 생명을 공급받는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박았다는 것은 생명의 공급원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선언이다. 나의 지정의가 여기에 근거하며 나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뿌리박음이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의 연합이라면, 세움받음은 삶의 모습이다. 습관이나 관계, 생활을 그리스도에게 두고 그리스도와 함께 설계하는 적용이다. N.T. 라이트는 말했다. “그리스도는 토대이고, 우리의 삶은 그 위에 일관성있게 지어진 구조다.“ 감사는 이런 진행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표식이다. 감사가 영성의 지표인 이유다. 적용 :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리스도 위에 삶을 세운다 선언 : 나는 그리스도로 인해 존재하며 성
골로새서 2:6-7
새 사람의 길-81 골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팀 켈러가 췌장암 4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죽음을 앞두었을 때, ”복음이 더 달콤해졌다“는 말을 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는 사실이 너무 복된 것임을 절감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그 이전부터 그가 전해왔던 티칭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생사의 기로에서 그 은혜의 깊이가 더 생생해졌다는 것이다. 이같이 영생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는 환경을 초월한다. 이 감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바탕하며 가치관 자체가 바뀌었음을 증명한다. 종교성에서 나오는 감사는 이런 분위기를 추정은 하지만 맛보지는 못한다. 즉 감사가 넘치기 어렵다는 말이다. 감정이 환경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존 파이퍼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더 깊이 즐기는 은혜’를 구하자. 사
호세아 6:3
새 사람의 길-80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복음적 신앙과 종교성을 구분하는 분깃점 중 하나가 ‘하나님을 앎‘에 있다. 종교성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무엇을 하셨는지에 크게 관심이 없다. 의지하는 대상, 원하는 기도를 들어주는 대상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을 읽는 데에도 열심이 없고 종교활동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메우려 한다. 종교성이 찾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닐 수도 있다. 존 칼빈이 ”인간의 마음은 영원한 우상공장이다.“라고 말한 이유다. 하나님을 알면 알 수록 신앙은 복음적 색채를 뚜렷이 한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이 이루신 일들을 알면 알 수록 마음은 든든해지며 샬롬은 기조가 된다.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되기에 매사를 하나님 마음으로 다루려 한다. 기적같은 일들은 이런 마음에서부
새 사람의 길 79
새 사람의 길-79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참된 신자에게 예수님은 믿음의 대상이면서도 믿음의 모본이 되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전적으로 의지할 주님이면서도 우리보다 앞서 믿음의 길을 먼저 가신 분이다. 즉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 우리가 가야 할 믿음의 길을 먼저 터놓으신 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으시면서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신 분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방식을 그대로 적용할 때, 예수님이 누리신 은총을 우리도 누릴 수 있게 하셨다. 이것을 예수님의 신실함에 참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강권하는 부분이다. 예수님을 따라가자는 것이다. 예수님은 주님이면서도 인도자시고, 돕는 분이다. 온전하게 하시는 은총을 받아 온전
새 사람의 길 78
새 사람의 길-78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또 다른 바울전문가인 마이클 고먼은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의 믿음에 대한 신자의 참여’를 권한다.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고난과 수치 속에서도 아버지를 신뢰하며 자기비움과 사랑으로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가셨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런 믿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온전함 믿음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된다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이 점에서 필요를 획득하려고 신을 구하는 종교성과 다르다. 사람들이 꺼리는 과정을 기꺼이 걸머지려는, 즉 십자가를 참는 신뢰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 신뢰가 의심이나 원망을 잠재우며 말씀의 성취를 보게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이 믿음으로 처녀의 임신에 쏟아지는 의혹의 시선을 통과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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