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5일


민 15:31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의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의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어지리라하나님을 알되 대충 아는 것은 위험하다. 부지중의 죄와 고의의 죄 사이의 경계선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아니지 싶은 것임에도 몰랐다고 잡아 뗄 수 있는 여지도 있거니와 심지어는 왜곡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은 베델과 단에 우상을 만들어놓고도 우상이라 하지않고 여호와라고 말했다. 명백한 왜곡이었지만 몇몇의 선지자 빼놓고는 북이스라엘 거의가 거기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다. 물론 처절한 대가는 피할 수 없었다.고의로 범죄하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파괴하는 자라 하였고 그 죄악이 자기에게 돌아간다 하였다. 대표선수로는 발람이나 가롯유다를 들 수 있지만 첫 아담도 빗겨갈 수 없다. 오히려 아담의 사례는 우리와 가깝다.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명령을 놓고 아담은 그것 하나 쯤.. 했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인색하신거 아닌가 생각했을 수도 있다. 명령을 지키는 자세가 너무나 안이했다. 명령은 파괴되었고 죄에 수반된 저주가 드리워짐으로 죄악은 당사자에게 돌아갔다.부지중의 죄도 반복되면 레드카드가 뜰 것이다. 결국 고의적 범죄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몰랐다는 말은 처음 몇 번 정도 참작될 수 있다. 진정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졌다면,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삶의 중심이 되었다면, 그래서 그 신앙이 기복적이거나 주술적 신앙이 아닌 건강한 신앙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알려하는데 열심을 가지려 할 것이다. 몰랐다는 말이 반복되는 것은 하나님에겐 자존감을 상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버림받은 사람이 사울왕이다.죄악은 죄인에게 돌아간다. 죄에 본질적으로 따라붙는 저주가 죄인을 찾아간다는 말이다. 아담서부터 하나님의 명령을 대충 알았던 사람들의 인생에 생긴 일들은 이와 연관이 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부실했던 대가들을 걸머지고 살고 있다. 매일마다 보혈의 공로를 붙들어야 하는 이유다. 요일 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젠 몰랐다는 말도 쉽게 할 수 없는 입장이 됐다. 십자가의 은혜 아니면 버팅길 수 없는 죄인이다. 물두멍이 감사하고 갈보리가 감사하고 보혜사가 감사하다. 더 혼나지 않는 신앙인생을 살아야 할텐데....

#정재우Joshua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욥기 9:27~28

욥 9:27-28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불평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생명의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토설은 매를 맞으면서도 엄마의 옷자락을 붙잡는 우는 아이의 마음이다. 엄마 이외에 다른 누가 없기 때문이며, 아울러 엄마만한 다른 누가 또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 밖에

욥기 8:6-7

욥 8:6-7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빌닷의 말은 그 자체로 구구절절 그른 데가 없다. 그러나 그 말이 권선징악 개념에서 오는 판단에 바탕한다는 점이 문제다. 원칙적으로 판단은 사람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관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욥기 6:10

욥 6: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4절에서 욥은 자신의 고통을 전능자의 화살로 비유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대적하신다고 여기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그간의 경건에서 오는 자신감의 반응일 수도 있다. 만일 죄책이 가득했다면 전능자의 채찍으로 인정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