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11:7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욥 11:9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소발의 말은 그른 데가 없다. 그러나 그의 말은 사실상 자신에 대한 말이다. 소발이야말로 하나님의 오묘함에 무지하다. 물론 그 시대에 주어진 계시적 한계이기도 하다. 그는 아직 영적 전쟁을 모르고 욥을 향한 하나님의 신임을 모른다. 오직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류의 대속을 위한 고난이었다면, 욥의 고통은 영적 진리를 깨닫게 하는 대리학습의 고난이다. 십자가 이전의 시대를 살던 신앙인들은 욥기를 통해 고통을 극복하고자 했다. 고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를 동경하며 현실적으로 가해지는 무거운 고난의 짐을 감당해내려 했다. 창세기를 통해 고통의 근원을 알고, 욥기를 통해 고통을 넘어 하나님을 붙잡으려 힘쓴 것이다.
십자가를 알고 영적전쟁의 구도를 안다고 하더라도 연약한 본성을 지닌 까닭에 내적 갈등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기왕 사는 거 좀 더 편안했으면 하는 마음이 소용돌이치는 때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고난을 이겨낸 내공의 비결을 이렇게 소개했다.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욥의 각성과 같은 맥이다. 하나님은 오묘하며 나 역시 전능자를 완전히 모른다. 테레사처럼 오직 신뢰가 필요하다. 오늘도 신뢰의 걸음을 딛으려 힘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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