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13-14

롬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첫 아담 때에는 하나만 안하면 모든 것이 가능했다. 그 하나가 선악과 금령이었다. 이제는 오직 한 길만을 가야하고 나머지 길은 모두 경계해야 하는 시절이 됐다. 그 하나의 길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다. 몸의 행실은 구원 이전의 옛사람의 방식이다. 악행이 대표적 문제거리인데, 애매한 부분이 가치중립적인 생활영역이다. 옛사람도 착한 일을 할 수 있었고 문화적인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난한 삶을 산 사람은 자신의 도덕성에 자부심을 가지기도 하고 굳이 신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길을 떠난 그 바탕이 치명적문제였다. 그것은 마치 지옥행 열차를 탄 사람이 그 기차 안에서 착한 일을 한 것과 같다. 지옥에 이르기 전에 천국가는 열차로 바꿔타야 한다. 그 환승이 구원이다. 환승한 사람은 삶의 방식이 바뀐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방식이다.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서 떠난 방식이다. 상식의 기준에서 악행이냐 아니냐를 넘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용납되느냐의 문제가 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영적 지각을 일깨워 육신적인 방식, 즉 몸의 행실을 죽이게 하신다. 항상 100% 성공적이지는 않아도 말씀을 따라 영으로 살려하는 기세가 대세를 이루게 해야 한다. 오늘도 나는 남아 있는 몸의 행실을 잘 죽이기로 작정한다.

LIVING LIFE 바로가기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욥기 10:8

욥 10:8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나치 수용소에서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참하게 죽임당했을 때, 반응이 여러가지였다. 우선 두드러진 것이 ‘신 죽음의 신학’이었다. 신은 죽었다는 것이다. 신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서 시작한 생각이다. 사실상 신을 버

욥기 9:27~28

욥 9:27-28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불평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생명의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토설은 매를 맞으면서도 엄마의 옷자락을 붙잡는 우는 아이의 마음이다. 엄마 이외에 다른 누가 없기 때문이며, 아울러 엄마만한 다른 누가 또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 밖에

욥기 8:6-7

욥 8:6-7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빌닷의 말은 그 자체로 구구절절 그른 데가 없다. 그러나 그 말이 권선징악 개념에서 오는 판단에 바탕한다는 점이 문제다. 원칙적으로 판단은 사람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관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