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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험하는 삶(1)


 

예언서를 묵상하면서 예언사역과 관련, 필요한 나눔을 가지고자 합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사역과 신약시대의 예언사역의 차이입니다. 구약에는 예언서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분량에 따라 대예언서와 소예언서로 나뉘지요. (유대인들의 히브리성경은 그 분류가 다릅니다.) 소예언서 본문을 빨리 펼치는 분들이 성경을 많이 읽는 분들로 간주되지요^^

대예언서(5권) -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소예언서(12권) - 호세야,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스가랴, 말라기

오늘의 핵심은 예언의 내용입니다. 묵상을 시작한 미가서를 비롯, 대부분의 예언서들이 책망과 심판, 그리고 섬뜩한 심판의 결말 등을 담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들을 통해 그렇게 질책하시고 정죄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위로와 소망의 내용도 적지않았지만 야단치시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던거지요. 그리고 그 내용이 그대로 경전이 될 정도로 하나님의 뜻과 영감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들어오며 예언사역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요약하자면 구약의 예언이 정죄와 판단, 책망의 기조인 반면, 신약의 예언은 은사적이요 덕을 세우고 위로하고 온전케하는 취지를 가집니다.

고전 14: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덕을 세운다는 것(오이코도멘)은 건축한다는 뜻에서 왔습니다. 파괴가 아니라 세우는 것이지요. 권면한다는 것(파라클레신)은 '변호하며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정죄가 아니라 조언과 충고입니다. 위로하는 것(파라뮈디안)은 힘과 용기를 얻게 한다는 뜻입니다. 신약의 예언사역은 구약시대와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율법이 지배하던 정죄와 책망의 시대는 끝나고 은혜가 지배하는 건덕(덕을 세우는 것)과 위로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언의 메시지가 정죄나 책망이 강하다면 올바른 사역이 아닙니다. 종종 예언사역을 한다면서 빛보다는 어둠을 끌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언을 받았으면 심령이 힘과 빛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주눅이 들고 가라앉는 일들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목사님, 덕을 세우려면 잘못된 것을 지적해서 바로 잡아야하고 그런 과정에서 예언사역이 쓰일 수도 있지않나요?'

- 구약시대에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해서 이스라엘이 나아진게 아니고 결국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고 실패로 끝난 우리에게 은혜와 위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정죄할 죄가 사라진게 아닙니다. 여전했지만 다루는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은사는 그렇게 달라진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필요한 책망은 누가 할까요? 성령께서 하십니다.

요 16:7-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께서 성도의 마음을 직접 다루십니다. 물론 설교자의 설교나 묵상, 성경연구, 집회에서의 역사하심 등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시면서 책망하시고 변화시키시지요. 구약시대는 성령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책망의 역할을 예언자가 떠안았습니다만 신약시대는 달라진 것입니다. 따라서 예언의 내용이 그늘지거나 부정적이거나 겁을 먹게 하는 것은 올바른 은사로서의 예언이 아닙니다. 오염된 물과 같아서 어두움이 틈탄 것이지요. 그리고 조만간 서로에게 그 어두움을 받아들인 대가를 치루게 합니다. 은정에서는 온전한 은사훈련이될 때까지는 예언사역은 아무에게나 오픈하지 않을 것입니다. 담임목사나 담임목사가 추천하는 예언사역자 아니면 예언사역이나 그 비슷한 사역을 절제시킬 것입니다. 축복과 위로와 소망이 아닌 예언이나 기도는 그 배후에 이른바 '조종의 영' 이 끼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받은 당사자는 '재앙이나 환난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돼요?' 묻게되고 그 다음서부터는 그 사람에게 끌려다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결국 모두가 시험들고 덕이 손상되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목사님, 그런데 그 분이 말하는 내용이 정확하게 뭔가를 맞췄어요. 그래서 따르게 되었어요. 그건 어떻게 된거지요?'

- 그르친 예언사역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분들이 많이 하는 말입니다. 예언기도를 받았는데 그 중에 정확하게 맞는 부분이 있어서 그 다음부턴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신약시대의 은사의 목적에 걸맞는 올바른 예언사역이 아님에도 뭔가 맞을 수 있는건가? 그럴 수 있습니다. 건전한 사역이 아니라면 맞게 하시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사역자의 영이 올바로 서지 않았음에도 맞는 것은 '미끼'입니다. 미끼는 그것을 덥석 물었을 때 이미 끝난거지요. 그런 분들에게는 드리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고장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다.' 어쩌다 시계를 봤는데 하루 두 번 맞을 때 봤다면 그 사람은 그 시계가 고장난줄 몰랐을 것입니다. 뭔가 맞추는 것은 어둠의 영역에서도 가능합니다. 그 용하다는 점쟁이들 중에는 귀신의 힘을 빌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정확히 맞추는 경우가 있지요. 그것 역시 영혼을 미혹하는 미끼입니다. 그것을 물으면 그 다음부터 그 세계에서 발을 빼는 것은 상당히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예언에 대한 분별을 맞았느냐 아니냐에 두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소위 '점치는 영'이 역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진정성에 대한 분별은 얼마나 하나님의 의중이 대변되었는가와 그결과 예언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더 하나님에게 가까이 다가갔는가(회복), 그래서 얼마나 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되었는가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에서 벗어나면 아무리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예언이 나와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가라앉게 하고 겁먹게하는 뭔가를 들었나요? 그냥 버리세요. 버려도 아무런 지장 없습니다. 대신 물두멍앞에 나와 영혼의 수족을 씻는 일을 게을리하지 마세요. 매일 묵상은 우리를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되게 할 것입니다. 예언서를 묵상하게 되어 신약시대의 예언사역에 대한 이해에 혼선이 없도록 드리는 말씀입니다.

독수리편대같은 은정 가족 모두를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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