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10:8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나치 수용소에서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참하게 죽임당했을 때, 반응이 여러가지였다. 우선 두드러진 것이 ‘신 죽음의 신학’이었다. 신은 죽었다는 것이다. 신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서 시작한 생각이다. 사실상 신을 버린 것이다.
반면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을 이야기했다. 그는 독일인으로 가해자측이었다. 전쟁말기에 독일이 무자비하게 유린당하는 참상을 겪으면서 그 역시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를 물었다. 그러다가 포로수용소에서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십자가를 깨닫고 신에게 귀의한다. 십자가와 종말이 연결되면서 희망의 빛을 본 것이다.
까닭없는 고통을 받는다고 느낄 때, 하나님을 대적자로 느낄 수 있다. 욥기는 그렇지 않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아직도 세 친구들의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욥은 금생이 소명이며 내세가 희망의 중심임을 역설한다. 만일 세 친구들에게 욥이 당한 고통이 엄습했다면 그들 중 몇이나 남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물질계나 인간계를 넘어서는 영성적 통찰과 각성이 중요한 이유다. 오늘도 그 은총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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