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9:26-27

삿 9:26-27 에벳의 아들 가알이 그의 형제와 더불어 세겜에 이르니 세겜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니라 그들이 밭에 가서 포도를 거두어다가 밟아 짜서 연회를 베풀고 그들의 신당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하니



아비멜렉을 옹립했던 세겜 사람들이 이제는 가알을 옹립하고 아비멜렉을 대적하게 된다. 이 모든 일은 23절에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악한 영들의 활동으로 일어난 것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악행이 악한 영을 불러들인 것인데, 악한 영은 기어코 악한 일을 벌인다.


악한 영들의 활동 패턴이 보인다. 분쟁과 저주, 우상숭배 등이다. 분쟁은 이간으로부터, 이간은 저주로부터 야기된다. 누군가를 비방하는 일을 주의해야 한다. 큰 틀에서 저주이기 때문이다. 강하든 약하든, 스스로에게든 타인에게든, 저주의 징후가 보인다는 것은 좋지않다.


건전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공동체를 세우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어느 지점부터는 부작용을 낳는다. 하나님의 방식은 접근부터가 조금 다르다. 약점을 끌어안고 가게 하는 방식이다.

벧전 3:10-11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건강한 공동체는 비판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워진다. 성령님은 사랑을 공급하신다. 나와 주변의 관계는 어떨까. 심지어 자아와의 관계에도 저주는 끼어들 수 있다. 이른 바 ‘자기 저주’(self-curse)이다. 간절함으로 성령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을 구한다. 오늘도 범사에 베드로의 권면을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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