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먼저 보냄받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이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사명길을 갈 수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사람들을 진정으로 회개시키기 위해 제도권을 벗어납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광야에 거주하면서 에누리없는 회개를 촉구하며 사람들의 심령을 정화시키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마음바탕을 구비하게 했습니다. 이미 제도권(종교의식과 종교지도자들의 관행)은 형식화되었고 잘못된 권위주의와 부패로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모셔들이는 은혜는 철저히 회개한 심령에 부어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먼저 세례요한을 만나야 했습니다. 은혜 이전에 먼저 회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먼저 보내신 것은 형식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제도권 사람들은 요한과 유사한 형태를 보이는 예수님에게 무슨 권세로 이렇게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당시 예수님 역시 제도권과 거리를 둔 행보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이 본문입니다. 이 물음은 제도권을 강타하는 질문입니다.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은 사람임을 인정하면 왜 그의 말을 받아들여 회개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며, 인정하지 아니하면 이미 그 마음은 요한을 보내신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신의 한 수'와 같은 질문을 던지신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형식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원래는 유대교도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성경에 대한 충성으로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형식화와 변질의 길을 걷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그 분의 은혜의 사랑을 받기 원하며 그 분과 교제하기 원하며 그 분의 능력을 체험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거룩한 체험을 했다는 확신은 없거나 약할 때가 많습니다. 요한적인 회개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촉구한 회개를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교의 제도권 사람들은 예수님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고 성경을 알고 행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가지면서 살았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이지요. 성수주일하고 봉사하고.. 이런 의식을 행함에 안주하면서 형식의 늪에 빠져가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특히 저같은 목회자들이 더 그런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거룩한 소명인데 밥벌이처럼 생각하거나 아니면 자기 이름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인간적 욕망을 성취하는 도구로 변질시킬 수 있는 것이지요. 성도들도 동일한 위험이 있습니다. 은혜와 감사로 가야하는 길인데 기복적이고 세속적 욕망의 성취를 위해 교회를 다니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모셔들이려면 요한의 회개를 구비해야 합니다. 요단강에 나아가 물로 씻듯 마음을 청결하게 할 때 사랑과 자비와 능력의 예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영혼의 자리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저에게 다시 한 번 저의 마음에 형식적 습관과 탁해진 부분이 없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은혜 이전에 회개입니다. 축복 이전에 정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