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마태복음 11:28-29

마 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삶은 짐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그렇게 되버렸다. 불교에선 ‘노병사’로 이어지기 전에 ‘생’, 그 자체부터 고통으로 인식할 정도다. 대형목회와 중형목회, 소형목회를 다 해보았지만 짐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짐이 없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문제는 기도로 짐을 맡기는데도 쉼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에게 배우는 데에까지 가지 못했던 까닭이다.


짐을 가장 확실히 맡기는 것은 그 짐을 예수님 멍에에 얹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멍에 안에 들어가 예수님을 따르면 된다. 당시 중동의 멍에는 한 겨리라 부르듯 두 마리의 소를 함께 부렸다. 종종 어린 소를 훈련시키기 위해 어미 소의 멍에에 함께 묶었다. 어린 소는 어미 소가 가는 대로 따라간다. 멍에의 무게나 멍에로 해야하는 작업은 이미 어미가 다 걸머지고 이루고 있다. 어린 소는 따라갈 뿐이다.


짐을 맡기고 쉼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예수님은 영성의 길을 가신다. 세상성이나 육성, 심지어 이성도 아니다. 이성이나 지성, 그 이상이다. 예수님이 걸머진 멍에는 영성을 이루는 길이다. 영성은 가치관에서 목적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리모델링한다. 짐을 맡기며 영성의 길을 갈 때 비로소 해방과 쉼을 얻는다.


이것은 삶의 치열한 현장에 있으면서도 누릴 수 있는 은혜다. 뒤늦게 개척목회를 하면서 이 보배를 얻었다. 종종 멍에 바깥으로 이탈할 때가 있다. 그러면 어깨는 다시 무거워진다. 제대로 잘 배우면 쉼을 얻는다. 쉼이 있는가를 살피며 배움에 있는지를 확인한다.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삼상 22:14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호위대장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아히멜렉이 사울에게 진언하고 있다. 추상같은 때에 목숨을 건 일이었지만 진실을 이야기한다. 모두가 왕의 광기가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을 때였다. 이 진언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삼상 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을 중심으로 아둘람공동체가 세워진다. 환난 당한 자들과 마음이 원통한 자들로 인생의 출구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다윗에게서 그 출구를 보았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는 다윗임에도

삼상 20: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기득권을 포기한 우정, 아버지와의 분리를 각오한 우정으로 다윗은 살았다. 결국 이 우정이 훗날 다윗을 왕위에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