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마태복음 10:37

마 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이 구절을 이해한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해서 가족들에 대한 사랑이 약해지거나 손상되는 것이 아니다. 더 심원한 인간이해, 수준높은 사랑의 풀어짐이 열리기 때문이다. 가족지간의 사랑이 소중한 것이지만 명제와는 달리 실상은 삭막한 경우가 적지않다. 이기심이나 무례함에 의해 망가지는 경우인데 이는 내면의 죄성과 사탄이 빚어내는 비극이다.


건전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순전함과 사랑의 원리가 가족 내부에 작동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 원리가 발출되는 곳이 주님이시다. 사랑의 주님은 아가페를 공급하신다. 그 은혜가 오히려 가족을 더 사랑하게 한다. 심지어 혈육이 아님에도 애정을 가지고 본토 친척 아비집도 떠나게 한다.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주님은 모두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며 사랑 안에서 온전케 하신다.


사람은 주님 사랑이 아니면 정서적 환자의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만큼 죄성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일매일의 신문 헤드라인이 증명한다. 사회시스템과 윤리를 세워 관계를 유지하려 하지만 아쉬움도 그못지 않다. 결국 주님 사랑 안에서 비로소 사람은 사람다워진다. 주님의 말씀은 가족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족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시는 것이다. 오늘도 성령님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함 받기를 구한다.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삼상 22:14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호위대장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아히멜렉이 사울에게 진언하고 있다. 추상같은 때에 목숨을 건 일이었지만 진실을 이야기한다. 모두가 왕의 광기가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을 때였다. 이 진언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삼상 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을 중심으로 아둘람공동체가 세워진다. 환난 당한 자들과 마음이 원통한 자들로 인생의 출구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다윗에게서 그 출구를 보았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는 다윗임에도

삼상 20: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기득권을 포기한 우정, 아버지와의 분리를 각오한 우정으로 다윗은 살았다. 결국 이 우정이 훗날 다윗을 왕위에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