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3:14-15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당시 이스라엘 내부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는 말이 돌았다. 제사를 드리고 힘겹게 규례를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변의 강대국들을 돌아보며 마음에 들어 온 시험이었다. 나라의 주인이 바뀌어도 여전히 그들은 지배자의 입장에 있었고 이스라엘은 속국의 입장을 면하지 못했다. 여호와를 시험하고 우상숭배에 몰두하는 사람들이었음도 그들은 계속 번성하고 강력했다. 도대체 신앙은 무슨 유익이 있는 걸까.
현실 문제로 신앙 유익의 유무를 판단할 때면 거의 어김없이 생기는 의문들이다. 특히 생활고나 삶의 짐으로 힘겨울 때에 이런 의문을 지녀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제 나눈 바 십일조가 물질관의 고비인 것처럼 현세적 유익에 대한 입장 역시 내세관의 고비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 나라와 영원의 세계에 대한 소망이 분명하지 않으면 현실문제로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부대낌을 털어버리기 쉽지 않다. 사람이 물질과 물리의 세계에 사는 존재이기에 더욱 그렇다.
성령으로 인해 심령의 눈이 떠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 분의 경륜, 죽음 건너편에 대한 진리에 대해 각성이 오지 않으면 ‘은혜’가 아니라 ‘현실’로 하나님을 알려하게 된다. 그러나 ‘지혜와 계시의 영’(엡 1:17)으로 인해 마음의 눈이 떠지면 순교도 불사하는 변화가 온다. 초대교회는 사도만이 아니라 성도들도 그런 확신으로 충만했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유지된다. 죄성을 벗어나 영성의 세계를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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