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눅 2: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님에게서 데스티니와 순종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데스티니로 인해 부모를 공경하라신 계명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셨고, 부모와의 관계로 인하여 데스티니의 길에 지장이 없게 하셨다. 한 하나님을 섬기며 그 뜻의 성취에 초점을 같이 맞춘다면 서로는 선순환의 시너지를 일으키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다. 한나와 사무엘의 관계도 좋은 사례다.
12세 때의 예수님은 이미 성전을 아버지 집으로 여기셨다. 율법주의가 팽배하던 당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던 시대가 아니었다. 불경하다고 여겨 하나님의 이름 조차 발음하지 않던 시대였다. 구약의 신명이 ‘여호와’도, ‘야훼’도 맞는다 한 것은 오랜 세월 신명을 발음하지 않던 전통으로 정확한 모음 기호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대신 아도나이, ‘주’라는 발음으로 대체했다. 그런 시대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성전을 아버지 집으로 여긴 것은 파격적 사고였다.
예수님 덕분에 전능하신 창조주를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 아버님도, 아바마마도 아니다. 아빠다. 아가페 사랑으로 가득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자녀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달을 정도로 나를 건져서 사랑의 관계를 열기를 원하셨다. 사실 워낙 부족한 터에 생각할 수록 얼떨떨한 은총이지만 엄연한 진리다. 격의 차이가 크지만 그 차이를 넘는 사랑을 계속 부어주신다. 이제 내가 사랑으로 반응하면 된다. 일관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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