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22:6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댕겨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밭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할지니라
화재 수습 조치에 대한 규례인데, 밭에 불을 놓다가 이웃의 밭에까지 손해를 끼쳤다면 불놓은 자가 배상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가시나무를 언급함이 흥미롭다. 보통 가시나무는 지역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크기가 십여미터가 넘는 경우도 많다. 가시로 인한 촘촘함 때문에 방풍림으로도 심지만 울타리용으로 쓸 때가 많다.
너와 나의 경계가 가시나무로 구분된다. 넘어오면 찔린다는 것이다. 혹은 찌르겠다는 의도도 배제할 수 없다. 사실 타인의 경계를 함부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적절한 선은 지켜져야 한다. 그런데 그선이 구분에서 그치지 않고 위협을 뿜어낸다면 삭막하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는 한 때 한국사회를 ‘날이 선 사회’로 규정한 바 있다. 이런 모습은 갈수록 더해지는 거 같다. 교회는 사회와는 달라야 한다.
하나님은 참된 신자가 가시나무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처럼 되기를 바라신다. 신자의 삶은 세월이 갈수록 안팎으로 이렇게 달라져야 한다. 내게 나타나는 열매로 내가 어떤 나무인지가 드러난다. 아론의 지팡이에 맺힌 열매가 살구였다(민 17:8). 하나님은 죽은 나무에도 살구가 열리게 하시는 분이다. 가시가 아니라 열매가 있는 나무가 되어야 한다. 아가페가 답인데 나도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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