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32:33 그들이 등을 내게로 돌리고 얼굴을 내게로 향하지 아니하며 내가 그들을 가르치되 끊임없이 가르쳤는데도 그들이 교훈을 듣지 아니하며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은 유다인들 모두가 당신에게 등을 보였다고 지적하신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양 다리를 걸쳤기에 가능한 상황이다. 그들은 성전에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자기 집 지붕에선 바알에게 분향했다(29절). 그들은 건물로서의 성전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자기네 편일거라 생각했다. 실상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대적하는 자리에 스스로 걸어들어갔다.
그들은 하나님을 우상의 수준으로 격하했다. 우상이 영달의 동기였던 것처럼 하나님도 영달의 수단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성전에서 장엄한 드렸던 제사는 하나님에게 오히려 모욕이었다.
사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대면이냐 비대면이냐를 놓고 쟁론이 분분하다. 진짜 살펴야 할 것은 그간의 우리 예배의 진정성이다. 그 예배들은 하나님에게 기쁨이었을까 양다리로 보였을까. 주일과 평일에 숭배의 대상은 같았을까 달랐을까. 32절을 보면 왕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주민들이 다 악을 행했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살필거라 생각했다. 진정한 회개와 변화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였다.
엘리야 때에 숨겨진 칠 천인들 같이 세상에 타협하지 않은 ‘남은 자’(remnant)의 영성으로 드려진 예배만이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오늘날 목회자다. 신정국가의 성직자들도 그렇게 물들었다면 오늘날은 얼마나 더할까. 그나마 ‘남은 자’의 길을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셈이다. 은혜의정원은 그 길을 가려고 세워진 교회다. 그런데 지금 그 길을 제대로 가고는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