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예정이나 주권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 영역에 대해 신학적 해석을 하려 하지만 실상은 대양의 물을 컵 하나에 담으려는 것과 같다. 사람에게 일어난 현상을 추정하는 것으로 어찌 깊고 부요한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를 온전히 알겠는가. 이사야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접했을 때 그가 즉각적으로 깨달은 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가 망할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겐 긍휼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누굴 긍휼히 여기시고 누굴 완악하게 하시는지 사람이 어찌 정확히 분별할 수 있는가. 회심 이전의 바울을 본 사람은 그가 필시 완악한 그룹에 속한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곧 긍휼그룹에 속하게 된다. 데마가 바울과 동역했을 때 누가 그를 완악하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결국 바울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갔다. 언제, 어디서, 그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심지어 선택받은 사람들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 안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존재한다. 이런 현실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한 최소한의 실마리가 있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간절함’일 것이다. 의에 대한 자신감이나 기복적 성향이 아니라 애통함과 가난한 심령과 같은 팔복의 마음이 긍휼 그룹의 표식일 수 있다는 것이다. 팔복은 천국시민권자의 영성이다. 팔복의 영성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오늘도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주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