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57~58

마 27:57-58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산헤드린 공회원이기도 했던 아리마대의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인도를 요청하고 나선 것은 거룩한 커밍아웃이다.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십자가 곁에 있었던 요한마저도 힘을 못쓰는 상황에서 요셉은 자신의 지위와 부를 사용하여 장례위원장 역할을 해낸다. 그가 나선 것은 단순한 동정이나 자비로 볼 수 없다. 그러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는 인생을 걸었다.

부활 사건 직후 요셉은 시신을 빼돌린 혐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 빈 무덤에 대한 책임을 물어 40년형을 언도받기도 했다는 사실확인이 어려운 전설도 있다. 그간 조용했던 그가 이 어려운 때 나선 이유는 뭘까. 처참한 형벌을 받고 무기력한 죽음으로 끝난 예수님 아니던가. 그가 부활의 가능성을 믿었을까. 이후의 성경 기록을 보면 부활의 현장에서 아리마대 요셉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가 예수님이야말로 진짜였음을 확신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보았던 거 같다. 마치 우편강도가 같이 죽어가는 예수님에게 하나님 나라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 것과 같다. 우편 강도의 메시야관은 당시 유대인들의 정치적 메시야관과 질적으로 달랐다. 더우기 공회원이면 예수님의 어록에 대한 분석도 마친 거로 봐야 한다.

이 분이 진짜다.. 이 분이 전한 말씀에 하나님 나라 가는 길이 있다.. 이 깨달음에 자신의 경력과 지위와 미래를 거는 일을 했다. 부활을 모르는 시점에 그랬다. 그러니 부활을 아는 나는 어떠해야 하는가. 빠짐없이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예수님을 부록처럼 여기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 아침에 각성의 의미에서 요셉이 내 뒤통수를 툭 치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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