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9: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가시관은 수난을, 자색 옷은 왕을, 이 사람은 인자를 가리킨다. 이 한 구절에 성육신과 수난과 부활이 다 실려 있다. 빌라도는 이 사람을 보라(에케 호모).. 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소개하는 일을 한다. 이 부분 때문에 이 구절은 상징적으로 꽤 유명한 구절이 됐다. 유대인의 왕으로 간주되었다는 정치적인 혐의로 재판에 넘겼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더더욱 왕으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단어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었다. 다윗이 왕이었기에 그 후손 역시 왕일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메시야사상은 세상정치의 수준에 바탕했다. 앞으로 오실 그는 이스라엘에 자유와 독립의 황금시대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벳새다광야에서도, 종려주일의 입성 이벤트에서도 열렬히 환영했던 것이다.
수난을 당하시면서 예수님은 외로우셨다. 예수님은 그렇게 혼자서 모든 질고를 지시고 묵묵히 구속의 일을 이루어 가셨다. 맞는 호칭을 쓰면서도 바른 해석을 하지 못하고 이해가 전혀 다른 사람들의 유치한 반응을 보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가셨다. 가롯 유다를 향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하셨던 예수님은 빌라도를 향해서도 같은 마음을 가지셨을 것이다.
복이라는 단어나 능력이라는 단어를 놓고 주님의 해석과 나의 해석에는 차이가 없을까. 예배에 대한 개념이나 동기를 놓고 주님과 나 사이에 이해의 차이는 없을까. 영성의 세계에 눈을 뜨면 뜰수록 주님과의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절감하면서 심지어 구원받은 게 맞는가 하는 고심을 한 적도 있었다. 주님의 관점을 우선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주님과 합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