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9: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바리새인과 맹인 사이에 예수님의 정체를 놓고 실갱이가 벌어졌다. 치유의 표적을 놓고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야로 증거한 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제거해야 할 공적으로 취급했다. 맹인에 대한 바리새인의 관점은 명백한 오류였다. 그의 질고를 죄업으로 간주한 오류였고 그를 가르치려 한 오류였다. 예수님에 대한 맹인의 증언은 참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맹인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말이 통하지 않는 사이였다. 고정관념과 완고함이 소통을 막았다. 저들을 보면서 ‘나를 가르치려 하느냐’는 생각을 하는 것이 무서운 것임을 깨달았다. ‘너는 죄인 아니었더냐’라는 생각 역시 교만에서 오는 것임을 절감했다. 물론 영적인 영역에선 이단과 사이비를 분별하는 분별력도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한, 거의 대부분의 사건이나 관계들은 배워야 할 무언가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보면 된다.
주님과의 사이에선 질문하는 것과 가급적 내 생각을 내려놓고 들으려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건이나 관계, 환경적 흐름 등도 분별의 레파토리가 될 수 있다.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무슨 오류는 없는지를 묻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다면 맹인을 고치는 표적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상기했을 수 있고 메시야의 도래를 찬양했을 수 있다. 그랬다면 ‘화 있을진저’가 아니라 ‘복 받을진저’를 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엄청난 기회를 날렸다.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의식하며 나의 생각 속에 나타날 주님의 반응에 집중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