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8: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릴 목적으로 간음한 여인을 데려와 처분에 대해 물었다. 그 때 두 가지를 행하셨는데 하나는 땅에 글을 쓰신 것이고, 또 하나가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것이었다. 당시엔 간음 등 주요 계명을 어긴 자는 투석살, 즉 돌로 쳐죽이는 관례가 있었다. 먼저 처벌 당사자의 아비가 돌을 던지면 준비된 형장에 있던 사람들이 쌓여있던 돌을 들어 던지는 형벌이었다.
땅에는 무슨 글을 쓰신걸까. 적지않은 설교자들은 십계명을 쓰셨을 것으로 추정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살벌한 현장에서 그 모습은 자연스럽게 눈길을 끌었을 것이고 한 두 계명만 가지고도 능히 십계명을 연상시키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자신들을 정죄하는 계명들을 접한다. 그리고 너나 할 것없이 죽을 죄인임을 자각하고는 슬며시 그 자리를 빠져나간다. 예수님은 용서를 전하신다.
용서와 화해는 다르다. 화해는 쌍방이지만 용서는 일방이다. 상대의 회개나 변화의 여지가 없어도 스스로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용서다. 용서는 상대에 대한 원한이나 적개심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상대가 변하지 않았을지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용서이며, 해야 하는 것이 용서다. 용서는 심판자이신 주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표시이자 자신 역시 용서가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겸허의 표시이기도 하다.
기세등등했던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하나 둘 씩 사라졌다. 세상과 사건들과 사람들을 보면서 정죄감을 가질 때가 있다. 정죄받아 마땅한 근거들이 수두룩했기에 거침없이 정죄한다. 주님은 네 말이 맞다고 않으시고 너는 죄가 없는가를 물으신다. 그러고보니 돌맞을 일이 허다했다. 세상을 두고 정죄할 일이 아니라 중보해야 했던거다. 이 아침에 나의 양심이 돌에 맞은 듯 얼얼하다. 은혜 아니면 살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