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3:1-2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바리새인은 종교를 상징한다. 종교는 중생과 다르다. 중생은 생명이다. 죠에라 불리우는 그 생명은 생명이되 영생에 속하는 생명이다. 그리고 죠에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연합에 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은혜를 얻지 못하면 결국 종교의 수준에 머물 뿐이다. 본문에서 니고데모는 종교를 상징하고 예수님은 생명을 상징한다. 종교에 속한 사람과 생명에 속한 사람은 각기 다른 나라에 사는 것과 같다.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는 멸망할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나라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다. 신구약중간사를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들의 뚝심은 대단했다. 니고데모에게서볼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알았고 표적도 분별하는 분별력이 있었다. 종교의 능력이다. 지식도 있고 행위도 있었다. 그러나 영생은 아니었다. 죠에의 차원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의 한계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구원받지 않은 채 하나님에게 최대한 다가 갈 수 있는 한계치를 보여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다. 행위가 탁월했지만 여전히 생명의 서클 안에 들지는 못한 것이다. 나는 진정 거듭났는가.
나는 진정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한 존재로 다시 태어났던가. 예수께서 나를 보실 때 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맞는가. 정녕 종교인이 아니라 영생을 소유한 거듭난 자녀가 분명한가. 이 아침에 니고데모는 새삼 내 영혼의 좌표를 근원적으로 점검하게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굳게 붙들며 성령 안에서 기쁨과 감사로 이 한 몸 드리며 평생 사랑으로 동행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