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19-20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리아의 수태는 성령으로 된 것이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동정녀잉태’라는 표현보다 ‘성령잉태론’이라 표현을 선호했다. 무죄하신 구원자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창조적 잉태였던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때의 경우나 죽은 자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신비가 개입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이성으로 어찌 이해할 수 있으랴. 요셉은 그 상황에서 최대한 덕스럽게 조치하려 했던 것이다.
창 3:15의 그 ‘여자의 후손’이, 그리고 사 7:14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라는 대목이 성령잉태라는 어마어마한 기적으로 자신에게 닥쳤음을 어찌 실감했겠는가.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일러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요셉은 상식으로 신비를 제끼며 이성으로 영성을 뭉개버리는 일을 능히 저질렀을 것이다. 요셉은 꿈을 통한 계시를 받아들인다. 마리아의 의연함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사실은 말씀에 담겨 있던 약속이었다. 그 약속이 워낙 하나님 수준의 스케일로 벌어지다보니 이해를 못하는 것 뿐, 지나고 보면 약속의 성취라는 간단한 도식이 있는 것이다. 상식으로 신비를 제끼거나 이성으로 영성을 뭉개는 일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마리아와 같은 마음 바탕이 필요하다.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게 필요하고, 말씀의 관점을 취하는 게 필요하고, 상식적/이성적 저항을 극복하는 게 필요하고, 말씀에 담긴 약속의 성취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게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의 신비가 지닌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다. 성탄주간에 요셉이 감당했던 그 무게의 한 부분을 느껴본다.
*소망과 인내로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수준을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 있는 영성의 그릇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