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람은 비천과 배고픔과 궁핍의 상태에서 자족하기가 쉽지않다. 자기 탓이나 남 탓을 하며 가라앉기 쉬울 수 있다. 비신자에게도 나타나는 상식적 수준의 반응이다. 신자에게 나타나야 하는 반응은 무엇일까. 일단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염려란 이방인이 하는 것임을 밝히셨다. 이방인, 즉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상징한 말씀이다. 그럼 염려하지 않을 때의 마음은 어떤 상태여야 할까.
바울은 ‘자족하는 마음’을 말한다. 어떤 형편이든 스스로 넉넉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런 마음은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참 앎으로 가능하다. ‘참 앎’이란 지식이나 관념이 아니라 체험적 앎을 말한다. 이른바 임마누엘의 실제이다.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한 것을 보면 바울도 이 수준에 이르기까지 연단이 필요했던 거 같다. 하루 아침에 그 수준에 이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배워갔다는 것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싸움의 과정이기도 하다. 비천과 궁핍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놓고 믿음과 상식 사이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공방전이다. 이 과정에서 믿음은 허실을 드러낸다. 데스티니와 영생의 확신이 분명하면 자족하는 은혜를 얻지만, 죄성이나 기복성이 강하면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자족하지 않고 있다면 점검이 필요하다. 넉넉함의 기준에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본문을 통해 읽는 이의 신앙의 허실을 드러낸다.
*바울처럼 일체의 비결을 배우기를 원하오니 그리스도를 ‘참 앎’으로 이르게 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