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9:4-5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교회와 신자를 박해하던 바울은 다메섹에까지 손을 뻗친다. 기독교의 뿌리를 뽑겠다고 마음먹은 바울이 그리로 가는 도중에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홀연한 빛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은 왜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 하셨다. 교회와 신자를 핍박하는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예수님이 주이심을 알게 된 것이다.
바울 역시 십자가에서 처참하고 무기력하게 죽은 죄수가 구세주일리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중의 하나이다. 구약성경에도 명백하게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사람이라 했다(신 21:23). 저주받은 자가 구세주라는 몽매한 교리가 세상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체험으로 그의 삶을 완전히 뒤집어진다. 이제 바울에게 남은 숙제는 구세주가 왜 십자가에 달렸는지를 파고드는 일이 됐다.
바울은 성경을 깊이 파고들었다. 특히 아라비아 광야에서의 수련기간을 가지면서 대속의 은혜를 담은 십자가의 도를 깊이 깨닫게 되고 그 후로부터 세상에 그 도를 전하기 위해 사도로 나서게 된다. 바울의 다메섹 도상체험은 온전한 회심체험이었고 소명체험이었다. 회심과 소명이 동시에 왔다. 온전한 회심, 즉 중생은 가치관, 인생관, 소명관의 변화를 가져 온다. 은혜가 강하면 어중간해지지 않는다.
바울처럼 깊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있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세상을 뒤흔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다. 교리와 신앙지식이 분명 필요하지만 체험이 받쳐주지 못하면 세상과의 사이에서 밀당하면서 힘들어지는 경우도 많다. 바울 역시 다메섹 도상의 체험이 아니었다면 뒤집어지기 어려운 사람 아니지 않은가. 은정에 이 체험적 은총의 부어짐을 간구한다.
*말씀기도
교리와 지식도 불충분한데 체험 조차 약하면 세상에 밀려 휘청거리다가 세월보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모두가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