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17:8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하나님은 다윗이 눈물로 침상을 띄울 때에도 그와 함께 하셨다. “하나님이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탄식하며 눈물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그와 함께 하셨다. 블레셋에 망명하여 침을 질질 흘리는 절박했던 때에도 그와 함께 하셨다. 하나님은 안계시고 온통 대적들로만 가득해보이던 그 때에도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계셨다. 연단이었다. 연단은 키우는 것이다. 일종의 그릇만들기이다.
눈물골짜기, 사면초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에겐 다 연단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다 저주이지만 다윗과 같은 사람에겐 어디까지 가게 할 것인지, 무엇까지 줄 것인지 가늠하게 하는 트레이닝이며 테스트이다. 생각해보면 주제넘게 항변하듯 한 때가 떠올라 부끄럽다. 아마도 ‘조금 멀었다..’ 아니면 ‘이 놈이 제 주제는 모르고..’ 하셨을 수도 있다. 다윗이 받은 연단은 스스로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했다.
연단의 시절에는 스스로를 빨리 내려놓는게 상책이다. 예수님은 내려놓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셨다.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곳이고 못박는 과정은 아프기 짝이 없다. 내 안에 그늘진 부분, 오염된 부분, 착각하고 있는 부분 등은 하나님께서 직접 다루셔야 사라진다. 나의 대적은 내 안에 있다. 이기심과 편견과 내로남불식 사고에 물든 나 자신이 대적이다. 이 자기중심성은 무엇이 그늘지고 오염된 것인지 잘 알지 못하게 한다. 연단이 불가피한 이유이다.
스스로 낮아져 개척의 길, 섬김의 길을 간다고 하면서도 갈수록 연단이 불가피한 존재였음을 거듭 절감한다. 소명도 소명이지만 정화가 절급함을 자꾸 깨닫는다. 하나님은 줄기차게 나의 내면을 수술하신다. 아프긴 하지만 그나마 수술받는 게 어디인가. 내면에 있는 대적들이 속히 멸해지기를 갈망한다.
*말씀기도
남이 아니라 내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늦은 수술이 더 아프긴 하지만 감사합니다. 내면의 대적들을 속히, 확실히 도려내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