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88:14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고난(3)
시인은 여호와를 부른다. 하나님은 경우에 따라 심판자로 불리시기도하고 여호와로 불리시기도 한다.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는 것 자체가 은총이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가 부르는 이름이다. 여호와는 구원의 이름이며 자비의 이름이다. 지금 시인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무정함을 탄식하지만 한 켠 항변하듯 하고 있다. 마치 자기가 필요로 하는 때에 사랑하는 아빠가 안나타났을 때 실망하는 것과 비슷하다. 실망하는 마음 그 기저에는 아빠에 대한 신뢰가 있듯이, 지금 시인의 마음의 바닥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다.
누가 하나님에게 감히 나를 홀대하느냐고 힐난할 수 있을까. 지금 시인은 하나님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다. 고통에서 나오는 탄식을 투정으로 빗댈 수 있느냐 할 수 있지만 아빠의 관점과 아이의 관점이 다르듯 같은 상황을 놓고도 하나님의 관점과 우리의 관점을 다를 수 있다. 아니.. 다르다. 하늘과 땅이 다르듯 다르다. 하나님은 고통 한 가운데 있던 욥에게 하나님을 여호와라 부를 수 있는 것 자체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귀한 복임을 알려주신 바 있다. 시인은 계속 하나님을 여호와라 부르고 주라 부르고 있다.
세상에서 겪는 아픔의 때가 지나가면, 하나님께서 여호와요 주로 부르게 하심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지 깨달을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 천상에 올라간 성도들은 줄기차게 찬양한다. 그러면서 이생에서 충분한 찬양을 드리지 못했음을 한했을 것이다. 영원에 예비된 어마어마한 영광들을 보면서 찰나같은 일들로 투정하며 불평했던 기억들을 부끄러워 할 것이다. 여호와를 부르자, 여호와를 찬양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자. 하나님께서 내 편이시고 주인이 되시고 아버지가 되어주셨다. 언제고 우리는 그 분의 품안에 있다. 내가 느끼든 못느끼든 그 분은 우리를 안고 계신다. 그 분은 여전히 여호와이시며 주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