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88:14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고난(1)
고난에 시달리다 보면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을 떨치기 쉽지않다. 더우기 잘 나가거나 무난한게 사는 주변 사람들을 볼 때 비교의식이나 상대적 박탈감에 더 곤혹스러워지기도 한다. 그 중 신앙인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을 막아주시지 않았다는 생각때문이다. 전능하시면서, 날 사랑하신다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는가 그게 풀리지 않는 것이다. 치유사역을 하다보면 사건이나 고난으로 인한 아픔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납덩이처럼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무수했다.
사실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인지적인 이해나 논리적인 설명은 가슴에 닿기 힘들다. 아픔은 주관적이고 그 통증은 객관적 시각을 무디게 하기에 바른 판단을 가지기 쉽지않다. 그러나 우리는 닥쳐진 상황에 좀 더 의연해질 필요가 있고,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그 원인을 분석하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물론 인과응보의 논리가 모든 고통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인과 결과라는 도식이 중요한 해석의 틀인 것은 사실이다.
고난의 기원은 아담이 받은 저주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까닭이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출생하여 율법의 저주로 주어진 고통을 숙명처럼 알고 살아가게 되었다. 파랑새처럼 행복을 추구하지만 생각지않은 불편한 일들의 기습을 몇 번 받다보면 두려움의 포로가 되는데 그 두려움 자체가 고난이 파고드는 틈새인줄도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욥 3: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욥을 살피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랑하실 정도의 영성을 지닌 사람임에도 이 땅에서는 불행을 겪을 수 있음을 보여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욥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숨기신다고 생각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그의 아내나 절친했던 친구들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은 욥을 버리시지도, 얼굴을 감추시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은 전력을 다해 욥을 주목하시고 계셨다. 욥은 버림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