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59:12 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나의 허물은 주 앞에 심히 많다. 내가 받는 고통이 죄인임을 증언한다. 그나마 이사야는 그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자기의 죄보다도 자기가 받는 고통에 민감할 뿐이다. 고통을 용인한 하나님을 원망한다. 사랑하시면 이럴 수 있는거냐고 항변한다. 그리고 슬며시 마음에서 신뢰의 끈을 놓는다. 어느덧 신앙은 형식이 되고 교회출석은 보험처럼 되버린다. 마음에는 한 번 보여줘보세요 하는 요구가 끊이지 않는다.
이사야는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봤을 때 망했다고 탄식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선지자였다. 나의 추정에는 그는 그의 죄성으로 영광 앞에 설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뼛속까지 죄인이라는 자각이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계시록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어린 양에게는 일곱눈이 있고 보좌주변의 네 생물은 앞뒤로 눈들이 가득하더라고 했다. 그 눈 앞에 어느 인간이 무죄하다고 버틸 것인가.
물두멍 앞에서 하나님의 입장을 헤아리면 하루 한 날도 회개없이 넘어가는 날은 없다. 멀든 가깝든 하루 한 날도 말씀을 떠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찰이나 직장 상사, 심지어 어린 자식이 보고 있는 자리라면 하지 않을 일, 하지 않을 말들을 하나님의 목전에 행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을까. 하늘의 그 눈들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긴 작정이나 약속은 하나 둘이겠으며, 성령께서 함께 계신 현장에서 가진 비성경적인 생각이나 행위들은 어디 하나 둘이겠는가.
이사야의 말이 이렇게 끝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나는 하나 더 추가한다. ‘내가 모르는 죄악이 더 많으나이다.’ 그 날이 오면 이생에서 내가 무엇을 저지르고 어떤 마음을 품었었는지 모든 것을 환하게 알게 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인간들은 죄에 익숙한 세상에 태어나 죄에 익숙한 삶을 배웠고 죄에 익숙한 인생을 살면서 뭐가 죄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는 철부지가 되어버렸다.
이런 무지와 무례함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밖에는 없다. 그 외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