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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묵상(4)ㅣ마 26:38


마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도 힘들었다. 단지 십자가형의 고통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나님께로부터의 버림받음’이라는 초유의 고통때문이었다. 그냥 죽음이 아니었다. 그 죽음이 끔찍하고 처절해서만도 아니었다. 십자가의 고통 정도로는 견줄 수 없는 ‘하나님의 유기’ 때문에 고민하여 죽게 되실 정도였다. 그 고통의 심연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 죽음을 죽으러 오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내내 그 죽음을 준비해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감당하시기가 버거우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임에도 고민스러웠던 이유이다.

순종의 길을 가는데도 고민스러울 수 있고 ‘죽겠네’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 순종과 소명의 길을 가는데도 마음이 고민되고 괴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힘든 것은 힘든 것이다. 그러고보니 주님도 힘든 것은 힘들다고 하셨다. 힘들 때는 힘들다고 토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럴 때는 공동체도 중요하다. 주님도 소그룹 멤버에게 토로하지 않으셨던가. 뿐만 아니라 ‘너희는 여기 머물러 함께 깨어 있어다오’ 하셨다. 함께 해달라 할 공동체가 있는가. 주님도 겟세마네에선 정원모임이 필요하셨다.

고민의 성격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주님은 소명의 무게 때문에 힘드셨다. 성격차이나 이해관계나 자기과실 등으로 힘드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로부터의 버림받음’이라는, 영원전부터 이제까지 겪어본 적이 없는 그 분리의 심연이 부담되셨던 것이다. 그래서 순종의 길을 가려고 애쓰는 성도들이 겪는 고민과 부담을 이해하신다. 뭐 그런 걸 가지고.. 라고 하시거나, 아직 덜 됐네.. 라고 안하신다. 주님의 고민을 들으면서 주님께는 죄송하지만 오히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순종의 길에서 힘들 때, 이거 이래서 되겠나 한심한.. 하면서 내 자신을 쥐어박았는데 꼭 그렇게 할 일만은 아니었던 것이었다.

*은정 가족들에게

소명의 길을 가는 중에도 고민과 괴로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이거 주님의 뜻이 아닌거 아닌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그렇게 의심하면서 방향을 틀으셨다면 십자가는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처럼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상급을 기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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