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여러번 초월을 체험했다. 다메섹 도상의 체험, 삼층천체험 등은 바울의 가치관과 소명관을 전폭적으로 뒤집어놓았다. 이런 계시적 체험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열려졌다. 그래서 바울은 ‘이끌림’을 받았노라고 밝힌다. 베드로의 변화산체험도 유사하다. 이렇게 복된 체험들이 부럽다. 진정 갈망한다. 이런 거룩의 체험은 체험한 사람을 뒤집는다. 초월이 주는 은혜이다. 더 이상 세상에 연연하지 않으며 자기를 중심에 놓지 않는다. 생의 방향은 확고하게 되고 육신의 소욕으로 추해지지 않는다. 주님께서 맡은 자에게 종종 주시는 보증서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큰 계시도 주셨지만 육체의 가시도 주셨다. 바울은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 기도했다. 삼세 번.. 그만큼 간절했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다. 아니 더 차원높은 응답을 주셨다. 고통은 그대로 두시되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이다. 9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큰 계시는 유익도 엄청나지만 위험부담도 있다. 교만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이다. 루시퍼는 이 위험에 빠져버렸다. 그리고는 망하는 존재가 되었다. 주님은 바울을 지키셨다. 육체의 가시 때문에 계속 주님을 의지하게 하신 것이다.
그 바울조차도 가시로 어거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사람은 연약하다. 그래서 우리는 늘 절대의존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된다. 주님은 쳐서라도 의존의 길을 가게 하신다. 아프게 하기보다 보호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러고보니 연약함 때문에 실망만 했다. 그만큼 의존하라시는 손짓임을 자주 놓쳤다. 그러고보니 얻어맞을 때 비로소 낮아졌다. 연약함과 아픔은 낭패로 가는 길을 막아주는 방책이었다. 진짜 낭패는 무엇인가. 주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안그러면 더 좋겠지만 주님께 얻어맞아도 좋으니 더 깊은 초월을 겪고싶다.
*은정 가족들에게
체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체험이 있어도 연약하고 체험이 없어도 연약한게 우리이지만 체험이 있다면 세상과 결이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저에게도 모든 교우들에게도 초월이 주는 깊은 은혜가 임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