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6장 1절에 언급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밝히고 있다. 바울처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은 항상 기뻐한다..는 것이다. 근심은 없었을까. 있었다. 근심의 내용이 다를 뿐이다. 바울의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었다. 어케하면 이 강퍅한 세상에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을까.. 그 완고한 미스터 김은 어떻게 해야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게 하나.. 작년에 개척한 그 교회가 분쟁없이 잘 자라야 할텐데.. 등등 이었다. 반면 세상 근심이 있다. 돈문제, 부정적인 정서문제 등등이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말고는 항상 기뻐했다. 예수로 말미암은 신령한 기쁨이다. 그는 예수님과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었고 그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시는 새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었다. 나도 믿고 풍성하기를 소망하는 영성이다. 바울은 가난한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였다. 그것도 역시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님이 계시면 모든 것을 가진 것과 다를 바 없다. 영의 세계를 깨닫고 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직 예수님으로 만족한다. 예의 그 초가삼간이라도 나는 만족하네~ 가 나오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간 개척목회를 하는 나를 보시면서 많이 갑갑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이전의 내 생각이 얼마나 세속적가치관에 물들어 있었는지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중형에서 바닥으로 내려왔을 때 어느 정도는 남들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을 했으니 그 다음에는 당연히 그 다음레벨로 가지 않겠나 했다. 그런데 주님은 환경을 다루신 다음에는 생각을 다루시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출입하시는데 걸림이 없도록 필요한 정지작업을 하셨다. 명분과 내면 사이의 거리를 좁히시는 것이었다. 항상 기뻐하는 쪽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요의식으로 생각의 캠프를 옮기셨다. 캠프는 생각이 자주, 많이 머무는 상태를 상징화시킨 것이다. 생각이 오가는 범위는 넓을 수 있다. 그러나 주로 머무는 캠프의 위치는 어디인가. 어쩌다 기뻐하나 항상 기뻐하나.. 의식은 어쩌다 부요한가 항상 부요한가.
*은정 가족들에게
원리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부요의식을 충만하도록 충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종종 생각의 캠프가 그 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때가 많습니다. 생각의 내용이 주님에게서 멀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끈질긴 싸움과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