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78:40-42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 그들이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
신앙생활은 기억을 바탕으로 하며 소망으로 전진하는 생활이다. 기억이 없으면 전진할 동력도 약하다. 그 점에서 광야의 이스라엘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애굽에서 보았던 이적들, 갈라진 홍해, 매일 아침 내리는 만나.. 기억의 레파토리는 많았고 또 강력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문제인데.. 우리는 애굽의 열 재앙과 같은 이적도, 갈라진 홍해를 건넌 적도 없다. 일상 중에서 전도를 받고는 버티고 버티다가 교회를 다닌 것 뿐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내가 갈라진 홍해를 건넜다면 출애굽 1세대처럼은 안했을거야.. 은연중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은 또 이렇게 이어진다. 홍해를 건너는 기적과 같은 일을 체험하게만 하신다면 더 충성하고 헌신했을텐데.. 과연 그럴까.
이적은 원래 사람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충분한 것이지만 정작 내면을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일 때가 많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위해 갈라진 홍해를 목격했지만 하나님 앞에 나오지는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그 때부터 애굽의 종교사는 달라졌을 것이고, 매년 절기 때다 애굽의 바로왕이 예루살렘에 순례를 왔을 것이다. 엄청난 이적을 목격했지만 바로는 변화되지 않았다. 갈멜산의 아합은 어땠나. 하늘에서 내린 불의 이적을 보고도 그는 변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방마누라인 이세벨에게 엘리야를 고자질하고 그 치마폭 뒤에 숨어들어갔다. 믈을 가르고 불을 내려도 변화가 안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적이 기회는 되지만 변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적을 보았다면 충성했을거라는 생각은 짧은 생각이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적을 보여주기보다 하나님 당신이 직접 찾아오셨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성령강림이 그렇다. 사건이 아니라 인격으로 함께 하시는 것이다. 구약의 축이 창조와 출애굽으로 이루어졌다면 신약은 십자가와 말미암은 새창조와 성령역사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더 완전한 계시의 시대, 더 온전한 변화가 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 1세대를 보라. 하나님의 선민이 되어 온갖 기적을 보고도 그들은 늘 하나님께 반항하며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을 노엽게 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라. 로마제국을 뒤엎는 일도 없었고 오히려 핍박을 당했어도 십자가와 성령으로 더 충성하고 더 헌신했다. 십자가와 성령강림은 출애굽의 온갖 기적들보다 더 귀한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기억해야 한다.
*은정 가족들에게
성육신과 성령강림은 실로 엄청나고도 파격적인 축복입니다. 홍해를 가르신 그 분이 직접 오셔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홍해기적으로 안되는게 내면의 변화이기에 직접 오셨습니다. 해석이 잘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기울어진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영성적 관점이 진정 소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