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큐티 01.05 ㅣ고전 1:18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었다. 혐오감의 대상이었고 비극의 표상이었다. 영적인 감각이 깨어있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십자가를 거부한다. 그 누가 그렇게 고통스럽고 버림받는 짐을 원할 것인가. 그런 사람에겐 십자가의 도란 무의미하고 미련하게 비친다. 십자가의 도가 감사한가. 감사하는 자는 멸망하는 자가 아니라 흥하는 자이다. 십자가의 도가 밋밋한가. 흥망 중간 쯤 있는 사람이다.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게 보이는가. 망하는 자이다. 자주 밋밋한게 우리의 약점이다.

십자가의 도는 초점이 천국에 있다. 부귀공명이 아닌 것이다. 세상의 행복도 아니다. 그렇다고 부귀공명과 행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그것들은 보너스이다. 본봉은 천국이다. 지옥행을 면하는 것부터 시작이고 그것도 엄청난 은혜이지반 영원한 천국의 영광에 비하면 별거 아니다. 여기에 핀트가 안맞으면 십자가가 왜 중요한지 알 수 없게 된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행복이 선두에 나서게 되면 십자가의 도는 숨어버린다. 아니 우리가 덮어버린다고 할까.

십자가의 도가 마음의 감사로 쉬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초점이 세상에 덮였기 때문이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있거나 행복이 멀리 느껴져서일 것이다. 영성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데 육성이나 물성으로 십자가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밋밋하다면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은정 가족들에게

십자가는 능력이고 축복입니다. 세상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를 사는 사람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높이에서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재우Josh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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