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큐티 12.05ㅣ요나서 4:11


 

욘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그 12만 명은 다 악하지는 않아도 대부분 악의 열매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주도하에 침략과 약탈이 벌어졌고 그들로 인해 고통과 슬픔이 온 땅을 뒤덮었다. 마땅히 천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벌을 받지 않으면 이 세상에 공의는 없는 셈이다.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가 그런 식으로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요나의 생각이었다. 분명 옳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요나는 확신을 가지고 반항했었고 니느웨가 벌을 피하자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들로 인해 끔찍한 죽음과 고통을 당한 약자들은 어디에서 위로를 받는단 말인가. 하나님의 정의가 이런 것이라면 어디에서 산들 낙이 있겠는가.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요나는 정의를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을 생각했다. 정의를 넘어선 사랑이다. 사랑은 정의를 넘어서야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사랑이 정의에 좌우되면 사실 사랑은 없다. 정의와 심판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니느웨에 대한 용서는 세상을 향한 용서이다. 심판받아 마땅한 죄악 세상을 향한 용서이다. 심판에 대해서 생각하면 나인들 그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가. 나를 포함해서 세상의 사람들은 둘 중의 하나이다. 더한 죄인과 덜한 죄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정의와 심판의 잣대를 가지고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남을 참소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요나가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한건 차라리 죄인들 모두 다같이 망하는게 더 좋습니다는 뜻일수도 있다.

물두멍영성의 기본이 남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 집중하자는 것은 남에 대해 판단할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연약함만으로도 버거운 것이 우리이기 때문이다. 훗날 요나는 십자가의 상흔을 지니신 예수님을 만났을 것이다. 정의를 넘어선 사랑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실감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느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그에게 예비된 천국의 영원함과 헤아릴 수 없는 풍성함을 누리면서, 그리고 끝도없이 계속되는 영벌의 참혹함을 곁눈질하면서 한 때 하나님께 고집스럽게 부렸던 치기를 부끄러워 했을 것이다.

*은정 가족들에게

우리 자신도 사랑하고 남도 사랑합시다. 니느웨도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라면 지인들과 이웃은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내려놓아야 할 내 생각을 자꾸 붙들지 말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고집스런 내 본성을 타이르며 성경의 진리와 성령의 감화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정재우Josh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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