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47:2-3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C.S.루이스가 '국가, 문화, 문명은 하찮은 것이다.'라고 한 것은 세상에 대한 일방적 폄하의 맥락이 아니라 불멸하는 영혼의 소중함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본문에 대한 이해 역시 종말론적인 세계관을 필요로 한다. 즉 천년왕국과 크고 흰 보좌의 심판에 이르는 종말론적 파노라마 가운데서 명백하게 수긍이 갈 수 있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사실상 고개를 갸우뚱거릴만한 의문점이 속출할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주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은 세계사적으로 갖은 고난을 겪은 피압박민족 그룹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내 가나안 원주민에 시달렸고, 앗수르에, 바벨론에, 헬라에, 로마제국에 눌리며 지낸 때가 많았다.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라는 내용을 문자적으로 말하려면 적어도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나 바벨론 성, 혹은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를 정복한 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렇다면 본문의 바램은 잡으려해도 잡을 수 없는 파랑새같은 것인가? 어떻게 이 말씀과 현실 사이의 커다란 간격을 소화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본문의 현대적 해석을 다음과 같이 하려한다면 곤란하다. 예컨대 대기업 사장이나 고위직 공무원, 전쟁에서 승리하는 장군들이 모두 교인이고 초강대국은 모두 기독교국가이어야 하고 그 국가의 정책을 기독교단의 총회에서 인준하는 그런 시대를 말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것은 종말론적 관점이 아니라 기복적 관점에 가깝다. 이 본문은 소망의 관점에서 품어야하는 말씀이다. 특히 요한계시록에 예고된 마지막 때의 파노라마를 바라보면서, 아니 그 이후에 펼쳐지게 될 새 예루살렘의 영원한 시대를 사모하면서 루이스의 말처럼 본질적으로 하찮은 이 세상을 향해서 선포하듯 전해야 하는 말씀이다. 마치 게세마네에서 체포된 예수님께서 로마총독에게 의연하게 말씀하신 것처럼 지위나 형편에 상관없이 종말 그 이후를 넘어선 궁극적 세계의 진실을 알려주는 내용인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을 다음과 같이 묵시적으로 표현했다.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바울은 이 본문을 신약적으로 이렇게 전했다. 골 1:11-12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나에겐 하나님의 기업이 예비되어 있다. 나는 장차 하나님과 함께 왕노릇 할 때가 예비되어 있다. 그러기에 나는 이 땅에서 그 확신과 그 배짱으로 산다. 오늘도 그렇게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