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6일


민 15:41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여호와란 이름(구약학계에선 '야훼' 라는 발음이 더 정확한 것으로 추정함)은 은혜의 이름이다.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냥 하나님이라 할 때에는 중립적이다. 즉, 구원자가 되실 수도 있고 심판자가 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여호와로 나타나실 때에는 나의 하나님이요,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지신 하나님, 나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인자와 긍휼의 하나님이 되신다. 하나님을 여호와(또는 야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은총이며 축복이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은혜와 동일하다. 이런 은혜를 입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주의할 부분이 있다. 그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는가이다. 좋게 유지할 수도 있고 고달프게 유지할 수도 있다. 가장 베스트가 하나님중심, 하나님우선이다. 당연히 그래야하는 것은 그 분은 절대자이시며 나는 한낱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차이로 보면 육군 대장과 일등병 사이의 간격보다 더 엄청난 간격, 재벌회장과 인턴 사이의 차이보다 더 한 차이이다. 원래는 그보다 더 더 어마어마하지만 최소한의 예를 들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누가 중심이고 누가 우선이어야 하는지 명백하게 드러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내가 밀고 당기거나 같이 놀 수 없는 분이다. 그 분이 하라 하면 해야 하고 하지말라하면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하라'거나 '하지 말라'는 것은 그 분을 위해서보다도 나를 위해서이다. 법칙을 지키는 것은 지키는 자의 안녕을 위해서 필요하다. 부패한 세상에서 통치자 중심의 법체계를 보면 지키는 자가 아니라 지키라고 하는 자를 위해서 법칙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그것은 타락한 세상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법은 모든 만물의 조화를 위한 것이며 피조물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법칙이 깨졌을 때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은 피조물이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면 하나님과의 사이에 질서를 세워야 하고 하나님을 존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삼상 2: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안식일에 나무를 하다 벌을 받은 사람은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 나름의 사정이 자주 앞서면 하나님의 법은 쉽사리 깨질 것이며 하나님은 멸시받는 존재가 되실 것이다. 나름의 사정, 나름의 편의를 앞세워 하나님과의 관계를 안이하게 한 적이 많았다. 나름의 입장이나 죄의 관성에서 오는 습관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지 않은 일들을 생각하면 낯을 들 수가 없다.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너무 철없고 무지하고 버릇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존중히 여기고 존중히 대하며 존중히 모시며 살기로 다짐합니다. 디테일에서 더욱 그리 하도록 힘쓰겠습니다..

#정재우Josh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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