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예수님은 당시에 종종 일어난 실화를 비유적으로 언급하셨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당시엔 지주가 소작인들에게 소작료를 받지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소유권 자체가 바뀌어지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잦은 전쟁과 포로 상황들로 인해 지주가 피난갔다가 연락도 없이 사망하거나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고의적으로 소작료를 받으러 온 주인의 종과 아들을 죽이는 스토리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지만 일간신문에 보도되는 수많은 비극적 사건들은 인간이 얼마나 복잡하고 부패한 존재인지를 드러냅니다. 배은망덕한 일들, 앞에선 웃고 뒤에선 비수를 꽂는 일들, 혀를 내두르게 하는 기막힌 죄들은 그런 사건들을 보도하며 배달되는 신문들이 세상을 덮고 있는 만큼이나 인간계를 뒤덮고 있는 형국입니다.
돈 앞에서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정의, 권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인간계의 추악한 그늘들은 하나님도 두 손을 놓는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하는 질문들은 이제 진부해졌습니다. 그런 일은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누적되어왔습니다. 포도원주인으로 비유된 하나님께서 앞서서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 각성하라 하셨고 드디어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셨음에도 인간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지나간 십자가 사건을 놓고 예수님을 죽이라 외쳤던 사람들을 탓하지만 우리가 그 때 그 무리가운데 있었다면 얼마든지 같은 입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후 초대교회를 통해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만 상처난 못자국은 칠로 덮어도 그 자욱이 남아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늘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지요.
뒤늦게라도 하나님 마음을 상심케 한 부분은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대가를 치루기 때문입니다. 18절의 '무릇 이 돌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돌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하여 어린 양같으시기도 하지만 철장권세를 가지고 진노의 포도주틀을 밟으실 분이기도 합니다. 만홀히 여김 받으실 분이 아닌 것이지요. 그러나 정작 우리는 그 분을 거래처 손님보다도 대우를 못해드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직장 상급자보다 못하게 대해 드리는 일도 무수합니다. 주님을 모시는 태도가 많이 경박했음을, 서슴없이 편의적으로 모시는 때가 많았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악한 농부들이 다름 아닌 나였습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해서 안이하게 대해드렸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주님이 육안으로 식별되는 분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일들이 태산같습니다. 안이하고 무례했던 무지와 교만의 날들을 회개합니다.
오늘도 살아계신 불꽃같으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육안으로 식별되듯한 분을 대하듯 인격적 순종으로 주님을 섬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