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 219장 주 하나님의 사랑은 /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에베소서 4:30
성령께서는 예수님 부활 이후 2천 년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희생만큼 성령의 강림과 내주하심 역시 그 못지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와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면, 그 길을 가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공생애 기간 중 예수님 자신이 떠나가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라(요16:7)고 하실 정도로 성령의 동행하심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 하시길 원하시는 성령께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첫째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4:30)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근심시키고, 탄식하게 할 때 성령은 우시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도 죄가 가득한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시며 우셨다는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과 죄와 더불어 함께하며 하나님에게 등을 돌릴 때 성령님께서는 우시는 것입니다. A. B. 심슨은 “성령님께서 근심하신다는 표현은 그분께서 분노하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당하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우시게 하지도, 근심시키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 분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 모르시는 경우도 없고, 떠나시는 경우도 없습니다. 다 보시고, 겪으시고, 탄식하십니다.
둘째 성령과 교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길 원하시는 분임을 알고 반응해야 합니다.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린도후서 13:13)라고 말씀합니다. 교통은 교제뿐만 아니라 동업의 의미도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와 동역하기를 원하십니다.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역하시고자 하는 성령의 성품은 마치 이기적이고 배신을 밥 먹듯 하는 동업자, 자기 실속만 챙기려 하는 못된 동업자를 그대로 끌어안고 변화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큼이나 성령의 인내와 사랑도 풍성합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야고보서 4:5)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때로는 질투 하실 정도로 너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끝까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이 완성되는 날까지 함께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에 반응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의 강렬한 사랑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의식하며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둘기는 순결의 상징입니다. 구약시대 새 중에서 유일하게 제사의 제물로 올려졌던 새입니다(레 1:14). 예수님께서는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명하셨습니다(마 10:16). 성령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고, 위로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또한 우리와 함께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동역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힘들게 하지 말고, 성령과 늘 교통해야 합니다. 그 성령의 은혜를 흡족히 받아 세상에 한눈팔지 말고, 오직 성령 아래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 세상적인 기준과 가치관으로 살아가지 않고 성령의 교통하심 가운데 성령과 동역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