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3:8-9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분봉왕 헤롯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한 것은 구원에 대한 갈망이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이적을 보고픈 마음에서였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셨지요. 사실 사람은 이적을 보면 약해지고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에서 이적이 많이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기 위한 표적의 기능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적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아무런 이적도 행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가르침을 베푸셨던 분인데 막강한 사회적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앞에서 아무 말도 않으십니다.
이적을 구하는 동기와 질문의 의도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었기 때문입니다. 말을 해도 못알아 들을 사람이었기에, 가르침을 주어도 받아담을 자리가 없는 걸 아셨기에 입을 다물어버리셨습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의 애타는 마음과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 때문에 갑갑할 때가 많습니다. 공생애 때에도, 교회사 가운데도 많이 베푸셨던 그 이적들이 왜 내 가까이서는 일어나지 않는가 서운할 때가 많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즉 더 많은 기도를 쌓아야 한다거나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적 연단이거나 하는 경우를 배제할 수 없지만, 적지않은 경우 초등학생에게 미적분설명을 안하는 것과 비슷할 때가 있습니다. 아직 수준이 안되는거지요.
내가 수준이 되는지 안되는지는 헤롯과 예수님과의 관계로 비교가능합니다. 헤롯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이적을 구경거리 정도로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직 정치적 타산과 권력유지, 부의 축적에만 올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적 가치관'이 아니라 '세상적 가치관'만 가득했습니다. 수준이 안되거나 코드가 너무 안맞으면 우리도 입을 다물듯 아무 말도 않으신 것입니다. 그 침묵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너는 그냥 지금처럼 망하는 길을 그대로 가라.. 난 너의 삶에 개입할 생각이 없다..' 주님의 침묵은 때로 서늘합니다. 오늘도 저는 그 분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엎드립니다 ;;
다윗처럼 신본주의로 살며 뼛속까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종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