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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 성령


 

찬송 : 195장 성령이여 우리 찬송 부를 때 /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요한복음 14:16-18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가진 자리에서 자신이 고난 당할 것과 제자들의 배반에 대해서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버릴 것이다.”라는 불길한 예고까지 하시자 제자들의 마음에 불안의 그림자가 엄습했습니다. 그 분위기를 감지하신 예수께서 두 가지 위로를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아버지 집에 너희들이 거할 처소가 많다.”라는 말씀(내세에 대한 약속)과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실 것이다.”라는 말씀(현재의 신앙생활을 위한 축복)이었습니다. 내세에 대한 약속이란,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보혜사란 우리의 신앙생활을 간수해주시는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첫째, 성령은 보혜사로 함께 하십니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입니다. 파라클레토스는 도우시는 분(Helper), 상담자(Counselor), 위로하시는 분(Comforter)이란 뜻으로, 본래 변호사나 중재자를 뜻하는 법정용어에서 유래한 말이었습니다. 이 용어에는 인간을 향한 성령님의 입장과 사명과 사역이 한 마디로 집약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변호자, 탄원자, 중재자라는 뜻으로, 피고인을 변호하기 위해 법정에 출두하는 친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 공생애 시대에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은 ‘돕는 자’라는 뜻으로 쓰이던 단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소개하시면서 그 단어를 채택하신 것은 성령께서는 마귀에게 속임 당하고, 빼앗기고, 고생하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고, 중재하시고, 상심한 마음을 위로해주시는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이유는 우리의 연약함을 돕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성을 극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임이며, 동시에 소외당한 영혼의 곁에 서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둘째,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과 같으신 분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똑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서는 ‘또 다른 보혜사’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 말은 처음 보혜사 즉 원 보혜사를 전제로 한 말입니다. 그 처음 보혜사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보혜사로 오셨고, 그 다음 성령께서 ‘또 다른’ 보혜사로 오신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다른’이라는 말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헤테로스’(ἕτερος)입니다. 이것은 본질과 기능과 모양이 전혀 다른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책과 시계가 전혀 다른 존재인 것과 같습니다. 둘째는 ‘알로스’(ἄλλος)인데, 이것은 모든 것이 똑같지만 ‘또 한 개가 더 있는 것’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모양이나 기능이나 재질이 똑같은 공책이 두 개가 있을 때, 우리는 그 두 개의 공책을 ‘동일한 하나의 물건’으로 보지는 않지만 ‘똑같아 보인다.’, ‘똑같은 제품이다.’라고 말합니다. 성령님께서 다른 보혜사라고 할 때 사용된 단어는 ‘헤테로스’가 아닌 ‘알로스’입니다. 즉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과 다른 분이 아니라, 예수님과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똑같은 활동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못 본 것에 대해 아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와 계신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똑같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대업을 맡겨 놓고 가시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자 예수를 증거하는 영이십니다. 성령께서 오심은 예수님께서 오신 것임을 늘 기억하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 보혜사 되신 성령께서 항상 함께 하셔서 돕고 계심을 인식하게 하옵소서. 더욱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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